[김명준의 뮤직세이] 음악이 우리를 위로하는 방법: 에드워드 엘가의 ‘님로드(Nimrod)’

 1912년 5월24일, 영국 런던 로열알버트홀(Royal Albert Hall)에 에드워드 엘가의 ‘님로드(Nimrod)’가 울려 퍼졌다. 직전 달 북대서양에서 침몰한 타이타닉호에 탑승해 침몰 마지막 순간까지 연주를 멈추지 않았던 8명의 음악가를 비롯한 침몰 사고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함이었다. 공연에는 당시 영국 음악계를 대표하는 저명한 연주자 473명이 참여했다. 우리나라에도 ‘사랑의 인사’ ‘위풍당당 행진곡’ 등으로 이름을 알린 작곡가 겸 지휘자인 에드워드 엘가가 공연의 지휘봉을 잡았다. 수천 명의 시민은 객석을 메워 슬픔에 잠긴 런던을 위로했다.

이날 공연을 시작으로 엘가의 ‘님로드’는 영국 국민을 위로하는 대표적인 추모곡으로 자리 잡았다. 1919년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에서 열린 제1차 세계대전 종전 기념식,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의 장례식(1965), 다이애나 왕세자비 추모식(1997),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장례식(2022)에서 님로드가 연주되어 전 세계에 깊은 감동을 선사했다. 지금도 매년 11월11일에 열리는 영국 현충일 추모 행사에서는 이 곡이 연주된다. 국내에서는 2014년 교향악축제 무대에 오른 수원시립교향악단이 세월호 침몰 사고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앙코르로 이 곡을 연주했고 김대진 지휘자는 관객들에게 박수 없이 조용히 퇴장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님로드가 처음부터 추모의 곡으로 작곡된 것은 아니다. 엘가는 1898년 어느 날 피아노 앞에 앉아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음을 즉흥적으로 연주했는데, 그의 아내가 이 선율을 마음에 들어 했고 다시 한 번 연주할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이에 응해 악상을 변주한 것이 오늘날 ‘수수께끼 변주곡’이라고 알려진 작품의 토대가 됐다.

그는 작품 전반에 걸쳐 음악적인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암시하며 ‘수수께끼’라는 부제를 달았다. 부제에 걸맞게 그는 14개의 변주 중 제13변주를 제외한 각각의 변주에 ‘C.A.E.(엘가의 아내)’ ‘Troyte’ 등 특정 인물을 나타내는 이니셜이나 단어를 적어 두었는데, 구체적으로 누구를 칭한 것인지 밝히지 않았다. 음악학자들의 오랜 연구 끝에 대부분의 인물이 밝혀졌으나, 작품 전반에 걸친 비밀이 무엇인지는 아직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님로드는 이 작품의 제9변주로, 엘가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아우구스투스 예거(Augustus J. Jaeger)를 위해 작곡한 악장이다. 정적이며 장중한 분위기에서 흘러나오는 관현악의 따스한 선율은 마치 행복했던 어느 지난 날을 회상하게 한다. 단순하지만 깊은 감정을 담고 있는 선율은 반복을 통해 작품을 절정으로 이끌며 청중의 마음속에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엘가는 이 곡에 친구를 향한 애정과 존경을 가득 담아냈다. 이 곡이 그에게 얼마나 특별했는지는 엘가가 훗날 작곡한 관현악과 합창을 위한 ‘더 뮤직 메이커스’ 중반부에 이 변주의 선율을 다시 삽입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이는 엘가가 이 음악에 쏟은 애정과 더불어 친구 예거가 그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지를 보여준다. 이렇듯 님로드는 단순한 변주를 넘어 인간적인 유대와 추억, 그리고 음악을 통한 위로의 힘을 상징하는 걸작으로 남아 왔다.

서양음악에는 죽음을 직접적으로 위로하는 곡들이 많다. 모차르트·브람스·베르디의 레퀴엠(진혼곡)이 대표적이다. 영원한 안식과 위로를 노래하는 가사는 떠난 이들뿐만 아니라, 남겨진 이들의 상처받은 마음도 어루만진다. 그런데 몇 마디 말보다 무언의 포옹이 더욱 위로가 될 때가 있다. 그 어떤 가사도 없이 마음을 울리는 엘가의 음악이 전하는 무언의 위로가 더욱 와 닿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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