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stening to the American Romantic: Samuel Barber
[김명준의 뮤직세이] 미국의 낭만 사무엘 바버를 듣다
후기 낭만주의 최후의 보루 사무엘 바버
어둠에서 피어난 희망 ‘진실로 빛나는 이 밤에’
1930년대 미국은 대공황으로 신음했다. 기업들이 도산하며 시민은 일자리를 잃었다. 극심한 빈곤에 아사자가 속출했으며 거리로 내몰린 이들도 상당수였다. 당시 생계의 문제로 소련으로 이주한 미국 시민의 수가 10만 명에 달할 정도였다. 영원히 빛날 것 같았던 뉴욕의 밤거리에는 침묵과 어둠이 자리했다. 미국 전역을 암흑으로 덮은 대공황은 1930년대 말까지 지속됐다.
1938년 어두운 터널의 끝자락, 당시 미국의 저명한 소설가이자 시인이었던 제임스 에이지(James Agee)는 대공황으로 무너진 미국과 그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은 채 삶을 살아 내고 있는 미국인의 모습을 시를 통해 그려 냈다.
‘이상향의 묘사(Description of Elysium)’라는 제목의 이 시는 많은 미국인의 가슴을 울리며 널리 애송됐고, 같은 해 당시 미국의 주류 작곡가였던 사무엘 바버(1910~1981)를 만나 ‘진실로 빛나는 이 밤에(Sure on this shining night)’라는 제목의 예술가곡으로 새롭게 창조된다.
20세기 초 미국 클래식 음악계는 기존 클래식 음악의 전통적인 화성과 기법을 탈피하고자 하는 현대음악의 급격한 물살을 맞고 있었다. 반음계·12음기법 등 듣기에 난해한 작곡 기법을 구사한 것으로 유명한 아놀드 쇤베르크·찰스 아이브스 등의 음악이 주류 혹은 대세로 여겨졌고, 유럽의 전통적 클래식 음악은 진부한 것으로 폄하되곤 했다.
음악계의 주류가 이러함에도 사무엘 바버는 ‘진실로 빛나는 이 밤에’를 작곡하면서 그 어느 작품보다 더욱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선율과 화성을 사용했다. 실험적 음악으로 원작 시의 아름다움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의 보편적인 음악적 방향성이 현대음악과 결을 같이하지는 않지만, 이 작품은 유독 그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 봐도 서정성이 두드러진다.
작품 속 성악 솔로와 피아노는 자유로우면서도 유기적인 호흡을 통해 삶을 둘러싼 인간의 고뇌를 예술 본연의 아름다운 언어로 창조해 낸다. 그렇게 이 작품은 10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미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예술가곡으로 남게 되었다.
작품 발표 후 23년이 지난 1961년 이 작품은 또 한 번의 변화를 맞는다. 작곡가 본인이 본래 성악 솔로를 위해 작곡했던 것을 소프라노·알토·테너·베이스 4성부 합창곡으로 편곡하면서다. 일반적으로 예술가곡은 피아노와 솔로 선율이 복잡다단한 진행을 주고받는 탓에 다성부 합창으로의 편곡이 쉽지 않음에도 그는 합창의 각 성부가 멜로디를 돌림노래 식으로 부르는 캐논적 기법을 사용해 작품에 새로운 변화를 불어넣었다.
돌림노래 방식의 캐논 기법은 17세기의 바로크음악과 18세기 초 고전주의 음악에서 자주 사용되던 것인데, 당시 음악 평론가들로부터 ‘덜 현대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던 바버는 오히려 자신의 작품을 낭만주의보다 훨씬 이전의 양식으로 돌려놓음으로써 지나간 시간에 대한 회상과 그리움을 증폭시켰다.
바버가 이 작품을 재편곡한 데에는 사연이 있다. 합창 버전이 출판된 해인 1961년은 그의 여동생 사라 바버가 세상을 떠난 해다. 여러 비판에도 바버가 수백 년 전의 바로크풍의 캐논적 요소를 오선지 위에 다시 불러온 것은 세상을 떠난 그의 여동생에 대한 감정 이입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바버는 악보 제목 위에 ‘사라에게’라는 자필 문구를 삽입했다.
혹자는 말한다. 리메이크는 오리지널을 따라갈 수 없다고. 하지만 바버의 ‘진실로 빛나는 이 밤에’를 듣고 있자면 꼭 그렇지만은 않음이 느껴진다. 28살 청년의 시선으로 바라본 밤하늘과 삶의 풍경은 다난한 삶의 여정을 거치며 더욱 성숙해졌다. 한층 차분해진 피아노 선율 속 마침표 없이 이어지는 듯한 4성부의 합창은 삶을 관통하는 무한한 생명의 순환을 역동적으로 그려 낸다. 격변의 20세기, 거센 변화의 물결 속에서도 음악 본연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고뇌했을 바버의 작품이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작은 위로가 되길 바란다.
2024년 2월, 인디애나에서
◇추천 음반
△합창 Ver. Atlanta Master Chorale: Sing on.(2021) No.11 ‘Sure On This Shining Night’
△소프라노 Ver. Roberta Alexander: A Retrospective.(1999) No.1 ‘Sure On This Shining Night’